아, 정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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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2-24 07: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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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인터넷의 바다를 헤매는군요
귀농인구가 2.5배가 늘어 작년에는 1만가구가 넘었고 올해는 2만가구가 넘을 예정이라니 정말 놀라운 변화인것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 대한 애착이 있고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니 고향으로 돌아오는 행렬이라고 볼수도 있겠지요
얼마전 새로 임명된 함참의장 정승조 대장의 고향이 정읍의 영원면이라는 것을 알고 정읍을 다시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은근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만하더군요~
서열은 국방부장관 바로 아래지만 실제로 전쟁이 나면 국방부장관보다 합참의장이 중심이라니 호남출신으로서 그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어느정도의 검증을 거쳤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청렴도는 물론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기에 가능하였겠지요.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나라가 어려울땐 꼭 유능한 장군이 있었는데 쓰레기같은 정치인들을 대신해 유사시에 빛을 발할 유능한 지휘관이 지금도 어느곳엔가 있을테고 이분이 그 역할을 다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제가 사는 덕천면은 황토현 전적지와 기념관이 있고 이웃해있는 영원면에는 "백정기 기념관"이 있습니다
백정기가 누구일까???
맨날 지나다니면서도 내부를 본적이 없었는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보고 또 깜짝놀랐습니다
왜 이런 사실을 진작 몰랐을까...
왜 학교에서는 이런인물들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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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파 백정기(1895-1936) 정읍 출신. 상해에서 육삼정 의거 실행.
우당 이회영 휘하의 아나키스트
구파 백정기는 일본 조계 육삼정이란 요정에서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 육군 대장 아라키 사다오 등 일본 정관계의 요인들과 국민당내 친일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계획, 실행에 옮기던 중, 발각되어 체포당한다. 윤봉길의 의거는 정말 멋진 성공이었지만 백정기 의사의 육삼정 거사 또한 우리가 동일한 무게로 그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폭탄을 던지려는 그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이라는 것은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똑같은 어려움과 똑같은 애국애족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백정기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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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을 시해한 안두희를 "정의봉"이란 몽둥이로 처단한 박기서씨의 고향도 정읍인데 빠뜨릴뻔 했군요
덕천면은 강증산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지금은 여기저기 신흥종교에서 우려먹고 있는....
정읍은 또 동학농민혁명의 고장이기도 하지요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전두환이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을 세웠으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을듯~~
혹시 가문을 위한 기념관이었는지도 모르죠.
결과적으로 잘한것이긴 하지만~
아래글들은 퍼왔습니다
================================== 전북의 법조삼성....
떡검·섹검에 벤츠검사, ‘대쪽검사’라고 들어봤나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30] ‘이승만 양녀’ 임영신 기소한 최대교 검사를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 정운현 / 2012-02-01)
최근 정치권 뉴스가 봇물을 이루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이 그것입니다. 지난 1월 27일 부산지법 형사합의5부(김진석 부장판사)는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된 이아무개 검사에게 징역 3년, 추징금 4462만여 원, 샤넬 핸드백 및 의류 몰수를 선고했습니다.
유사 사건에 비해 상당히 중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이날 재판부는 “형사사건의 공소제기와 유지, 사법경찰관을 지휘하는 검사로서 고도의 청렴성이 요구되는 피고인이 내연 관계에 있는 변호사로부터 청탁과 함께 알선의 대가를 받아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실형을 선고하는 게 마땅하다”고 중형 선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검사는 권력의 상징이자 대우나 급여 또한 최상위에 드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는 초임부터 행시 합격자(5급, 사무관)들이 15년 이상 근무해야 승진할 수 있는 3급(부이사관)에 해당하는 지위를 누립니다. 지난해 1월에 공포·시행된 ‘검사의 보수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11년 차 검사의 경우 봉급 487만 원과 유사 급여인 직급보조비 75만 원을 합해 총 560여만 원을 월급으로 받고 있습니다.
이 금액이면 여타 직종에 비해 결코 급여가 적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검사는 ‘공익의 대변자’라는 명분과 함께 수사 사건의 공소권을 갖고 있으며, 그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독립 권력기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검찰은 대체 어떤 모습입니까? 공신력은 차치하고 뇌물과 사건 청탁 등으로 인해 대중들의 손가락질과 함께 비판의 도마에 올라 있습니다.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에 이어 최근 ‘벤츠 여검사’까지 등장하면서 검찰은 이제 비리 집단의 대명사가 돼버렸습니다.
지난 시절 권력자의 시녀 노릇을 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직도 비리와 불공정한 수사로 본분을 망각한 처사는 검찰의 존립기반조차 뒤흔들고 있습니다. 최근 민주통합당의 한명숙 대표와 문성근 최고위원은 검찰개혁을 당의 최우선 과제로 표방한 바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검찰사(史)에는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바람직한 인물이 과연 없었던 것일까요?
‘대쪽 검사’의 상징, 최대교 검사
▲ 전북지역 ‘법조 3성’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법조 3성’ 동상. 왼쪽부터 김홍섭 판사, 김병로 대법원장, 최대교 검사 ⓒ정운현 |
전주시내 덕진공원에 가면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동상(좌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동상은 전북 출신의 훌륭한 법조인 3인의 삶을 기려 1999년 11월 건립됐는데, 이 지역에서는 이들을 ‘법조 3성(聖)’이라고 부릅니다.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전북 순창), ‘사도(使徒) 법관’으로 불린 김홍섭 전 대법원 판사, ‘검찰의 양심’으로 불린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전북 익산) 등이 그 주인공입니다.
가인은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무료 변론을 한 공로로 법조인으로는 드물게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가톨릭에 귀의한 김 판사는 재판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재판철학으로 실천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마지막 한 사람, 최대교(崔大敎·1901~1992) 고검장. 그는 우리 검찰사에서 ‘대쪽 검사’의 상징으로 불리는 분입니다.
1980년대 후반, 저는 ‘백범 김구 선생 시해사건’ 관련 취재차 최대교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그는 서울 신문로(새문안길), 현 씨티은행 자리에 있던 2층 건물에서 다른 원로 변호사 몇 분과 함께 공증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일주일에 한두 차례 출근하고 있어 사전에 약속하고 만났습니다.
당시 90에 가까운 고령에도 기억력이 좋았던 걸로 기억납니다. 백범이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한 1949년 6월 26일,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이날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낮 1시경 검찰청으로 출근한 그는 반 시간쯤 지나 당직 중이던 이원희 부장검사로부터 백범이 암살당했다는 보고를 접했습니다. 그는 현장 검증을 하기 위해 즉시 이 검사와 함께 지프를 타고 백범이 머물렀던 경교장으로 내달렸습니다.
경교장으로 가던 중 그는 관할경찰서인 서대문경찰서에 잠시 들러 서장을 찾았더니 서장은 숙직실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가 호통을 치면서 사건 현장에 가지 않고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서장은 손을 내저으며 “검사장님 모…못 갑니다. 헌병들이 지켜 서서 절대 못 들어가게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그는 경교장으로 향했는데 서장의 말대로 입구에서 헌병들이 제지해 경교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검찰청사로 돌아와 분을 삭이고 있는데 얼마 후 헌병 대위가 찾아와 현장 검증을 해도 좋다고 해서 다시 경교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백범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으며, 시신은 경교장 2층 집무실에 흰 광목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소신 굽히지 않은 최 검사… 이승만의 미움을 사다
▲ 화강 최대교 검사 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최대교 검사 동상 ⓒ정운현 |
약 30분 동안 현장검증을 마친 후 그는 곧바로 권승렬 장관과 함께 이범석 국무총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이 총리는 사냥을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공덕동에 있는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는데, 신 장관은 백범 서거 소식을 듣고는 “이제 민주주의가 됐군!”이라며 뜻 모를 말 한마디를 던졌다고 합니다.
문제는 용의자에 대한 영장청구. 당연히 담당 검사장인 그의 몫이었는데 뜻밖에도 김익진 검찰총장이 직접 영장청구를 하자 그는 김 총장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그러자 김 총장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경무대 쪽을 가리키며 “저 영감태기(이승만)가 노망이 들었지…, 저 영감이 최 검사장한테는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리된 거요. 양해해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즉각 사표를 제출했으나 권 장관이 집까지 찾아와 반려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여 뒤인 1949년 9월, 그는 결국 사표를 쓰고 검찰을 떠나게 됐습니다. 발단은 당시 ‘이승만의 양녀’로 불린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독직사건(사기 및 수뢰혐의)을 기소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해 4월 초 감찰위원회는 임 장관에 대해 업무상 횡령·사기·수뢰 등 혐의사실을 잡고, 파면 결의와 함께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는 즉시 강석복 검사에게 수사 지시를 내렸는데, 수사 과정에서 임 장관이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상공부 직할 적산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으로부터 270만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 등을 밝혀냈습니다. 이에 대해 임 장관은 “선거사무장이던 여동생(임영선)이 이 돈을 받아 선거비용으로 쓴 것”이라면서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증거 인멸을 우려해 임영선을 구속했습니다.
동생이 구속되자 임영신 장관은 여동생의 세 살짜리 어린애를 안고 경무대로 달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동생의 석방을 호소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이인 법무장관을 불러 석방을 지시하고 이인은 다시 권승렬 검찰총장에게, 권 총장은 다시 그에게 임영선을 석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소 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전속권한이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돼 있다. 법무부장관이 검사의 구체적 사건의 기소, 불기소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생각되니 재고하라”며 이 장관의 요구를 뿌리치고 임 장관을 전격 기소했습니다. 이 일로 이 대통령의 미움을 산 그는 결국 얼마 뒤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는 법과 양심에 비춰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불의와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정치권력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청렴한 생활과 그에 바탕을 둔 올곧은 기개였습니다. 서울지검장 시절 그의 월급은 1만 7000원, 당시 쌀 한 가마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의 봉급만으로는 가계를 꾸려 나가기가 어렵게 되자 그의 아내는 몰래 봉투를 만들어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시락을 쌀 형편이 못돼 점심시간에 누룽지를 밥 대신 먹다가 출입기자들에게 들켜(?) ‘누룽지 검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4·19 혁명 후 10년 만에 서울고검장으로 검찰에 복귀한 그는 당시 학생들이 당시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 관용차가 너무 많다고 시위를 벌이자 ‘백 번 옳다’며 그날로 서울고검장 차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이튿날부터 아현동 집에서 서소문 검찰청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가장 본받을 만한 청백리 법조인
▲ 생전의 최대교 검사 ⓒ자료사진 |
그의 강직한 기개는 일제하 총독부 검사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23년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를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法政)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1932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법조인이 됐습니다.
초임인 부산지검 검사 시절 그는 사표를 던져 총독부의 압력을 물리친 적이 있는데, 당시 조선 법조인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됐습니다. 사연인즉슨, 일본인 순사가 조선인 절도 피의자를 때려 숨지게 한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는데 총독부 경무국은 법무국을 통해 담당검사인 그에게 기소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인 순사에 대한 기소장과 자신의 사표를 동시에 검사정(檢事正·현 검사장)에게 올리고 출근을 하지 않았고, 이 일로 그 순사는 결국 재판에 회부됐습니다.
이승만 정권에 의해 반강제로 검찰에서 물러난 그는 4·19혁명 후 서울고검 검사장으로 복직했습니다. 그는 3·15 부정선거사범과 4·19 혁명 당시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한 책임자들을 기소해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은 그에게 혁명검찰부장을 맡아 달라고 제의했으나 그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당시 군부세력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른바 ‘혁명정부’에 협조했다면, 그는 검찰총장이나 법무장관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었을 것입니다(민복기 대법원장의 경우를 감안하면 그같은 추론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는 5·16 이전부터 당시 맡고 있던 서울고검장 자리를 한동안 지키다가 1963년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나와 대통령이 되자 미련없이 검찰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호는 화강(華岡)입니다. 이 아호는 ‘강화(江華)에 본관을 둔 강직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어준 것입니다. 위당은 그의 강직한 기개를 두고 ‘가을 강은 맑지만 부드러워, 배를 띄우지 못하는 얼음 강과 다르다(秋水之淸淸而柔 不如氷江不可舟)’라고 시를 지어 읊은 바도 있습니다.
또 저명한 형법학자인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은 법대생들에게 화강을 ‘가장 본받을 만한 청백리 법조인’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5년, 검찰은 검사의 표상으로 삼고자 ‘이준 검사상’과 함께 ‘최대교 검사상’을 제정한 바 있습니다.
최근 중견 검사들이 법복을 벗자마자 고액 연봉과 함께 대기업으로 직행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공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다가 하루아침에 재벌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검사들을 보면서 새삼 기개와 청빈의 삶을 살았던 화강이 그립고 또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91977&CMPT_CD=P0000
아래는 백정기의사 관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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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의 눈물 (김구, 신규식, 윤봉길, 백정기,여운형, 안창호, 이회영 외)|
우리는 우리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일본에게 먹혔고 식민통치를 받는 동안 비굴하게 살아야만 했으며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 분자들만
설친 역사, 그리고 매국노 자식들이 아직도 땅을 되찾고 있는 역사,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역사 등으로 뭔가 구질구질한 느낌만 먼저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나라를 잃은 적이 없다.
단지 강도에게 일시 강탈당했을 뿐이다. 길거리 지나다 날강도를 당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러한 사건에 어떻게 대처 했는가 이다. 우리민족의 99.9%가 모두 열렬하게 항거했고 찬란하게 투쟁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식민통치의 역사가 아니며 친일파의 배신과 굴절과 비겁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스스로 자각해 나아간 역사이며 신의와 지조와 용맹을 떨친 민중의 역사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사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동북지역의 무장투쟁과 화북지역의 의용투쟁, 강남지역의 외교투쟁으로 나눌 수 있다.
강남지역의 외교투쟁이라 함은 바로 대한만국 임시정부의 27년간 기나긴 고투를 말한다.
“오등은 자에 아 !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는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3.1 기미독립선언서이다. 단재 신채호는 상해에서 동포들의 3.1만세 소식을 듣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이 선언서를 읽고는 밋밋한 최남선의 문장에 분개하고 찢어 버렸다.
육탄혈전을 선언한 길림 무오독립선언(1918)과 너무도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이라는 선언은 훗날 친일 행각을 벌이는 육당 최남선
개인 생각이 아니라 우리 조선 사람 전체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할 것이 있다.
3.1운동은 종로 태화관에 모인 33인이 주도해 일으킨 사건이 아니다.
주도적 힘은 민중의 각성, 그 자체에서 나왔지만 이 거대한 국제적 이벤트를 조직한 사람은 바로 몽양 여운형(1896-1947)이다.
1914년 몽양 여운형은 남경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1917년 7월 정식으로 졸업을 한다. 여운형은 김구 선생과는 세대가 다르고 감각이 달랐다.
그는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철학, 영문학, 서양역사 등을 제대로 공부한 20세기 지식인이다.
민족주의적 소신이 확실하고 폭이 넓고 스케일이 큰 사람이었다. 그가 1918. 8. 20 상해에서 조직한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의 모태가 된다. 1922년 12월 자진 해산한 신한청년당의 멤버는 여운형을 비롯,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우 6명이다. 6 명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신한청년당은 3.1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한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1856-1924)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여
그 당시 많은 약소국가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세계대전의 패전국에 소속된 나라에만
적용되는 이론이었다. 승전국인 일본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는 해당사항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윌슨의 특사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상해 영파로 칼튼 카페에서
강의를 하자, 여운형은 크래인과 면담에 성공한다. 여운형이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단을 보내겠다고 하자,
크래인은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어렵다며 그러나 너희 민족이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단합된 힘을 보여주면
그것을 빌미로 해서 미국을 비롯한 나라들이 일본에 압력을 넣을 수는 있을 것이다 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크래인과의 면담에서 여운형은 힌트를 얻어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파견하고 장덕수를 국내에 파견,
자금을 모집한다. 또한 소설가 이광수(1892-1950)를 일본으로 보내 유학생들의 동경 2.8독립선언서를 만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길림으로 가서 길림 무오독립선언의 촉매 역할을 한다.
길림 북간도 독립운동의 대부 규암 김약연(1868-1942)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당시 그곳에
체류하고 있던 박은식, 이동녕, 조완구 등을 만나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대한국민회의의 결성의 모태가 된다.
대한국민회의 : 1919. 2. 25 우스리스크에서 시작한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최초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에 선우혁이 국내에 들어와 오산학교 교장이며 천도교 계열인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저간의 활동을 설명하고
민족적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3.1운동이라는 결실로 나타난 것이다.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의 멤버들의 국제적인 마인드와 노력이 없었다면 3.1운동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신한청년당은 상해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산파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임시정부가 탄생하자 임정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진 해산한다.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정오에 암살당한다.
여운형은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어느 날 아침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를 키우고 도와준 숨은 인물이 있었다.
온 국민이 합의에 의해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단 것은 세계열강이 인정하던, 하지 않던 우리나라는
신생독립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식민통치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1919년 3월 1일에 독립국가가 된 것이다.
독립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논리적으로 국가를 상징하고 통치하는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부를 세우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니고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한인들은 정부를 세웠다.
그런데 한 국가에 정부가 여러 개이면 나라꼴이 우습게 된다.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 한국 국내에 그런 정부를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 끝에 상해로 정한 것이다.
당대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이며 한국에서 가까우면서도 일본의 손이 함부로 미칠 수 없는 외국조계 등이 많았던 상해는
활동의 여백이 있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러나 상해는 동북지역과 달랐다. 동북지역에는 1860년대부터 한인들이 이주하여 자연스럽게 한인마을이 구축되어
독립운동의 하부구조가 형성되었지만 상해에는 한인들이 많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하부구조가 전무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해에 임시정부가 만들어 질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놓은 거물이 있었다.
손문의 신해혁명에 투신했고 여운형을 비롯한 수 없는 인물들을 키웠고 임시정부의 하부구조를 만들고
소리 없이 고결하게 생을 마감한 인물, 그는 예관 신규식이다.
신규식(1879-1922) : 호는 예관. 충북 청주 출신. 정통 무관. 중국신해혁명 참가
신아동제사. 박달학원. 신한혁명당 조직
상해에 있는 한국인들은 프랑스 조계에서 활동했다.
조계란 외국이 조차한 치외법권 지역을 말한다. 당시 영국은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당연히 영일동맹을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한국인의 활동이 보장되는 곳은 프랑스 조계밖엔 없었다.
신규식은 이 프랑스 조계에서 진독수와 앞뒤 집으로 살았다.
진독수(1879-1942)는 북경대학 문과대 학장을 지냈고 당 중앙위원회 총서기까지 지낸 중국공산주의의 아버지이다.
그가 만든 잡지 ‘신청년(新靑年)’은 당시 100만부가 팔려 나갔다.
중국의 모든 낡은 사고와 관습을 예리하게 비판하였고 최초로 공산주의 이론을 소개하였다.
중국 근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독수와 잡지 ‘신청년(新靑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규식은 이러한 진독수와 둘도 없는 친구였고 동갑이었다.
신규식은 중국 신문화운동의 핵심에 앉아 세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신규식이 산 집은 신해혁명의 주역인 진기미(1878-1916)의 집이다. 진기미와 신규식은 같이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같이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다. 신아동제사는 중국혁명 운동의 중심인물로 구성되었는데 한국독립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신규식이 만든 단체였다.
그 회원에 송교인, 호한민, 진기미, 대계도, 진과부, 호림, 오철성과 같은 거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진기미가 원세개 타도 운동을 전개하자, 원세개가 자객을 보내 진기미를 죽인다.
그가 죽었을 때, 권력 눈치를 보며 아무도 그를 조문하지 않았는데 신규식은 제일 먼저 달려가 진기미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통곡을 했다. 신규식은 의리와 사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신규식은 1912년 상해에 박달학원을 세운다.
3기에 걸쳐 100여 명의 인재를 배출했는데 여운형, 윤보선, 이범석 등이 이곳을 거쳐 갔다.
박은식, 신채호, 홍명희, 문일평, 조소앙, 조성환 등이 교사를 했다. 이 박달학원은 인재의 성품과 재주를 파악,
알맞은 곳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무관학교로 가겠다던 윤보선을 너는 무관이 맞지 않으니 공부를 더 하라며
영국 에딘버러 대학으로 보냈고 이범석은 무관이 어울리니 무관학교로 보냈다.
신규식은 같은 문중으로 신채호의 아저씨뻘이고 구한말 정통무관 출신이다.
영어 일어를 배우려는 풍토에서 중국어를 선택, 유창한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정통무관이다.
1905년 을사늑약을 당하자, 통분한 마음에 음독자결을 시도하고 눈 한 쪽을 잃는다.
신규식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문무를 겸비하였고 새로운 공화정에 대한 비전을 갖추었으며 고루함이 없었다.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손문(1866-1925)을 도왔다.
중국혁명을 성공시킴으로서 조선의 독립이 조기에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도 비록 표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신규식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임시정부 27년 역사에 있어서 국가대국가로 인정받은 것은 손문의 호법정부가 유일한 것이다.
그것도 신규식이 1921, 11, 3. 직접 광동에 가서 손문 대총통을 만나 국가대국가간의 외교관계를 승인받은 것이다.
그 약정에는 정부승인과 한국학생들의 교육, 차관, 그리고 한국독립군 양성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훗날, 장개석 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게 되는 것도 이 호법정부의 승인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아버지인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모든 독립운동 물줄기의 시작을 이루는 거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좌우 합작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규식의 비전을 뭉갠 사람이 우남 이승만이다.
1920년 12월, 이승만의 임정 대통령 취임부터 임정은 분열되고 내분에 휩싸인다.
예관 신규식은 실의 끝에 곡기를 끊는다. 자결을 통한 항거였다.
1922년 9월 25일 예관은 숨을 거둔다. 향년 43세. 그의 사후 임정은 유명무실해지고 만다.
새로운 역사가 필요했다. 그 새로운 역사가 예관 사후 10년 후인 윤봉길 의거였다.
윤봉길의 의거는 당시 엄청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장개석은 국민당 군대 1개 군단도 할 수 없는 일을 조선인 개인이 해냈다며 찬사를 보냈다.
뉴욕타임즈는 1932년 4월 29자 1면 톱으로 윤봉길 의거를 다루었다.
윤봉길은 중국인들에게 위대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임정으로는 자금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매현 윤봉길(1908-1932)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흔히 윤봉길을 상해로 망명가서 공장직공, 채소장수 생활을 하다 김구를 만나게 되어 폭탄을 던졌다고 알고 있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폭탄사건은 그렇게 간단한 사건이 아니다.
폭탄을 던지기까지의 윤봉길 인간 내면의 의식 흐름은 범인으로서는 도달키 어려운 경지였다.
윤봉길은 당대 최고급 지식인이었다. 사서오경, 사마천의 사기에 능통하고 한시를 자유롭게 지었으며
세계역사와 신문학에 밝았다. 그는 예산군민을 일깨우는 계몽운동에 앞장선 청년 교육자였다.
독립운동사 열전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의 이면에는 조금씩의 하자가 숨어 있다.
그런데 매헌 윤봉길처럼 하자가 없는 인물도 찾기란 어렵다.
물론 그가 24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는 지행이 합일된 인물이었다.
당시 상해 임정은 정말 별 볼일 없었다. 김구가 국무위원으로 추대되어 근근이 이끌어가고 있었다.
김구 자신의 표현대로 거지 소굴에 지나지 않았다. 하는 일은 없고 방 월세는 밀리고 때론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져야 했다. 그런데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국인들의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임정활동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의열투쟁 비밀결사)을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는 상해사변(1932. 1-5월) 한 가운데서 일어났다는데 세계사적 의의가 있다.
그것은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과 구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상해 사변이란 일본이 만주국 건립에 대한 열강의 이목을
따돌리기 위해 일으킨 상해 대 침공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중국 군대의 완강한 저항을 받았다.
1932년은 중국인의 일본에 대한 적대감정이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상해 홍구공원은 지금은 문학가 로쉰의 묘가 있어 로쉰공원으로 불린다. 상해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처이다.
홍구공원에는 ‘매정’이란 윤봉길의 기념관이 있다. 당시 윤봉길은 입장권이 없었지만 일본 부호처럼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도시락폭탄을 들고 입장하는데 성공한다.
반면, 이 홍구공원을 노린 또 한 사람, 구파 백정기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들어가지 못한다.
구파 백정기(1895-1936) 정읍 출신. 상해에서 육삼정 의거 실행.
우당 이회영 휘하의 아나키스트
구파 백정기는 일본 조계 육삼정이란 요정에서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 육군 대장 아라키 사다오 등
일본 정관계의 요인들과 국민당내 친일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계획,
실행에 옮기던 중, 발각되어 체포당한다.
윤봉길의 의거는 정말 멋진 성공이었지만 백정기 의사의 육삼정 거사 또한 우리가 동일한 무게로 그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폭탄을 던지려는 그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이라는 것은 성공한 사람이나 실패한 사람이나 똑같은 어려움과 똑같은
애국애족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백정기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에 관한 역사적 맥락, 전체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위만주국을 성립한 후, 강남까지 진출, 중국대륙을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이에 김구는 좀 더 효율적 투쟁을 위해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열투쟁에 나선다.
1932년 초, 이봉창(1900-1932)은 동경 한 복판에서 일본천황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진다.
비록 불발이 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중국신문들은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아깝게도 불행하게도
들어맞지 않았다.”라고 대서특필한다. 여기서 ‘아깝게도 불행하게도’는 불행부중(不幸不中)으로 표기,
중국인의 대일 감정을 표출했다. 일본은 상해를 침공하는 구실을 만들고자 과거 훈춘사건처럼 자작극을 꾸민다.
주 상해 일본공사 시게메찌 집에 불을 지르고 중국인이 질렀다는 핑계로 상해를 침공한다.
의외로 국민당 군대가 잘 막고 있었으나 장개석이 공산당 토벌이 더 시급하다는 판단으로 상해는 점령당하고 만다.
일본은 상해를 점령한 전승기념일을 히로히토 천왕 생일날에 맞춰 홍구공원에서 가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윤봉길의 폭탄은 중국인들 가슴에 맺었던 한을 풀어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봉길 의거가 단순히 일본의 주요 인사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어떻게 역사가 구조적으로 변했는가 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윤봉길의 의거는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되고 임정으로 자금이 유입되었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후 우리의 독립운동은 해방될 때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게 된다.
홍구홍원에서 죽은 육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1868-1932)는 다나까 게이찌, 우가끼 타츠스께와 더불어
일본 육군 3걸이라 불리는 거물이다. 그는 상해파견군 사령관이었다.
일본 주중공사 시게미찌 마모루(1887-1957)는 복부 이하에 30개의 파편이 박혔고 오른쪽 다리가 송두리째 날아 버렸다.
이 시게미찌 마모루는 1945년 9월 2일 미주리 함상에서 목발을 짚고 외무대신으로 맥아더 앞에서 항복문서에 사인하는
그 사람이다.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나기 4년 전에 대만의 타이뻬이시에서는 당시 윤봉길과 같은 24세 나이의 조선청년이
일본천황의 장인이자 육군대장인 쿠니노미야에게 칼을 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안중근과 같은 평북 신천 출신의 조명하(1905-1928)였다.
그는 22세에 신천 군청에서 판임관 후보로 등용되어 출세 길이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는 6.10 만세 사건을 겪으며 의열의 피가 솟구쳐 오오사카로 간다. 공장과 상점 점원을 전전하며 학문을 익히고
때를 기다렸다. 상해 임정으로 가려다 중간 거처로 대만으로 간다.
그는 대만인 치구에게 고금도를 구입해 매일 밤 검술을 익힌다.
때 마침 대륙침공의 후방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대만의 주대만군 시찰에 나선 쿠니모미야가 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1928년 5월 14일, 조명하는 쿠미노미야의 동선을 파악하고 커브길 모퉁이의 나무 뒤에 숨는다.
커브길에는 차량 속도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을 한 것이다. 조명하의 칼은 히로히토 천황 장인인 쿠미노미야의
목에 정확히 꽂힌다. 완벽한 단독 범행이었다.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타이뻬이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윤봉길 의거의 주변에는 숨겨진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많다.
한인애국단의 핵심 멤버 중 하나인 이화림이라는 여성동지도 그중 하나이다.
이화림(1905-?) : 평양 출신. 무술의 고수. 중산대학 법학부, 의학부.
화려한 무장투쟁 경력. 조선의용군에 참여.
이봉창이 일본 갈 때도 이화림이 슈류탄을 사타구니에 숨겨 가져갔다.
윤봉길 홍구공원 의거 때도 처음에는 위장결혼하여 부부로서 현장에 접근하려 했다.
이화림은 후에 조선의용군에서 활약했기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윤봉길 의거 전 날, 김구는 임정 멤버와 관계자들에게 의거 사실을 알리고 도피하도록 한다.
그런데 도산 안창호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안창호의 흥사단 조직은 개방조직이여서 기밀보장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거사 당일 아침 9시에 소식을 알린다.
그런데 안창호는 집에 없었다. 도산은 거류민단 단장 이유필의 집에 가고 없었다.
이유필의 중학교 다니는 아들에게 2원을 친히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어린이 날 행사 모금에 2원을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약속은 꼭 지킨다는 도산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산은 이유필 집에서 검거되어 국내로 호송되어 4년 형을 받았다. 그 뒤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
간경화가 악화되어 서울대 병원에서 운명한다. 그가 죽기 전,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목인아 ! 목인아 ! 자네는 너무도 큰 죄를 지었구나” 이다. 여기서 목인은 무쯔히토, 즉 명치천황을 가르킨다.
도산의 인품과 인격의 거대함을 느끼게 한다.
우당 이회영은 윤봉길 의거가 있었던 그 해, 상해에 있었다.
그는 김구와 윤봉길 의사의 행동력과 실천력에 충격을 받는다.
우당은 동북의 아나키스트 조직을 재건하고 당시 여순에 있었던 관동군 사령부의 사령관 무토오 노부요시(1868-1933)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는 당시 66세의 노구였다.
아나키스트 동지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나 평생을 동지로서 같이 살아온 둘째 형, 이석영(1851-1934)에게는
작별을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석영은 서간도를 개척하는 모든 자금을 댄 바로 그 형이다.
작별을 고하는 그 이야기를 석영의 아들, 우당에게는 친조카인 이규서가 엿들었다.
당시 이규서는 매독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는데 일본 영사관 앞잡이 연충렬에 의해 포섭된다.
헌데 연충렬은 김구의 오른팔인 엄항섭의 처조카이다.
대련항에는 20여 명의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우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회영이 내리자마자 대련항 일본 수상경찰서에 의해 일망타진된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그 순결한 이회영은 왜놈들에게 이곳에서 무지막지하게 맞아 죽는다.
그것도 사랑하는 친조카의 밀고로 죽은 것이다.
상해에 남은 아나키스트 동지들은 연충렬과 이회영의 조카 이규서를 유자명이 운영한 입달학원으로 유인하였다.
김구가 만나자고 한다니까 이들은 김구의 거처를 알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온 것이다.
물론 일본영사관이 보낸 것이다. 이들은 일찍 와서 학원마당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상해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한인청년동맹 동지들은 두 사람을 뒤산으로 끌고 가 곤봉으로 처치해 버렸다.
그리고 우당 이회영의 제단을 만들어 고유하였다.
울음바다가 되었다. 황포강이 흐르는 상해에서의 처절하고 한 많은 눈물이었다.
우리독립운동사의 슬픈 이야기는 이 뿐만 아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안중근의 친 아들 안준생(1906-1951)은 왜놈에게 포섭되어 본국에 돌아와 이토오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오 히로쿠니에게 부친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고 미나미 자로오(1874-1955)조선총독을 아버지라 불렀다.
또한 안중근의 친 동생 안공근(1889-1940)은 문헌상에는 김구의 주치의였던 유진동(1908-?)의 집에서 행방불명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사실은 윤봉길 거사 후 유입된 자금을 가지고 홍콩으로 튀었고 후일 중경으로 유인, 소환되어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였지만 돈 앞에 허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길회철도(길림, 회령간을 잇는 일제의 철도)를 건설하는데 드는 일제자금을 우리 독립군이 탈취하는 대 사건이 있었다.
1920년 1월 4일, 철혈광복단 소속인 최봉설, 윤준희 등 6명이 용정 동량어구에서 매복, 탈취한 금액은 자그마치 15만원이었다.
당시 소총 한 자루 가격이 30원 할 때이다. 탈취한 자금은 블라디보스톡까지 어렵게 운반된다.
무기구입을 위해 이 때 접촉한 사람이 엄인섭이다. 엄인섭은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었고 같이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러나 15만원 탈취 사건 당시 엄인섭은 일제 밀정으로 변해있었다.
엄인섭은 무기구입 하는데 위험해서 총이 필요하다고 거짓말하고 6 명의 동지들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리고 일본영사관에 밀고하여 헌병대가 덮치게 한다. 15만원은 다시 고스란히 빼앗기고 최봉설만 구사일생으로 도망한다.
나머지 동지들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된다.
안중근이 형으로 모신 유수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엄인섭은 비열하고 악랄한 인간이었다.
만일 이 때, 15만원으로 무기를 구입했다면 소총이 5,000자루이다.
연해주, 북간도 일대의 무장투쟁이 좀 더 활성화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김구는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킨 사람이다.
김구의 기나긴 삶의 역사는 동학으로부터 시작해서 해방 후 분단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 현대사의 전부이다.
그는 황해도 시골 동학 접주로서 해월 최시형을 만났고 남북 분열을 막기 위해 이승만과 싸웠다.
김구는 윤봉길 의거로 인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단독범행임을 성명서를 통해 발표한다.
곧 그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린다.
그는 절강성 장을 지낸 저보성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절강성 가흥 별장에 숨는다.
그리고 주애보라는 중국 여자의 정크배에서 부부생활로 가장하며 살았다.
낮에는 정크배에서 생활하며 널어놓은 빨래의 색깔로 안전과 위험의 표시를 하며 지냈다.
김구와 같이 5년을 생활한 주애보는 김구가 떠날 때 100원 밖에 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김구가 피신한 이곳은 수양제가 판 대운하의 일단이다.
임시정부는 1932. 5월부터 1935, 11월까지 아름다운 항구 도시 항주에 머무르다 마지막 종착지인 중경으로 간다.
우리가 보통 임시정부를 상해 임시정부라고 말하는데 임시정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많이 이루어진 곳은 중경 임시정부이다.
따라서 상해 임시정부라는 말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김구는 중경 오사야항 침침한 방에서 백범일지를 썼다.
한국독립운동사는 결말을 놓고 보면 굉장히 허망하다.
그러나 역사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어떠한 노력이 있었고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려 했고
온갖 투쟁으로 나타난 우리민족의 저력, 도덕적 의지, 불굴의 투지 등을 보아야 하고 발굴해야 한다.
이러한 독립운동사의 뼈저린 역사는 후세 우리가 국난을 당했을 때, 우리의 후손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게 될 것이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윤진현) 한국항일독립운동사(신용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김명선)
백범일지. 도올의 한국독립운동사(김용옥) 외
출처: http://cafe.daum.net/4m5m/IMrm/902?docid=12TxA|IMrm|902|20100723120238&q=%B5%B6%B8%B3%C5%F5%BB%E7%20%B9%E9%C1%A4%B1%E2
댓글목록
이건기님의 댓글
정읍 쪽에 좋은 정기가 흐르고 있나 봅니다.
운영자님의 댓글
보기싫은 놈 있는곳에 안가고 하기싫은 것은 안하는게 좀 심하거든요~
정읍은 반골기질이 있나봅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