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금)선물받은 빨간책~
- 작성자
- 운영자
- 등록일
- 2014-03-26 10:34:08
- 조회수
- 2,237
머리를 쓰셔야 치매에 안 걸린다고 하니
머리 한번 써보시지용~ㅎ
어느 보석 가게에 손님이 70만원짜리 진주를 사고는 100만원 수표를 내밀었다 주인은 잔돈이 없어서 옆집에 가서 현금으로 바꿔서 손님에게 30만원을 내 주었다 다음날 옆집에서 부도 수표라며 환불을 요구하길래 100만원을 다시 돌려 주었다 보석 가게 주인은 얼마를 손해 봤을까요?
1, 100만
2, 130만
3, 170만
4, 200만
예비역 영관장교 모임에서 답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고 하네요.
어떤 답이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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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다음의 모까페에서 까페지기님이 올린 글입니다.
저는 4번이라고 댓글달았는데 답은 1번이라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갑니다만~
그런데 정답을 맞춘 회원들에게 선물을 보내준다는 뜻밖의 예고를 하더니 저한테도 아래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아차상이라고....^^
미리 상품을 예고했으면 까페지기 거덜나지않았을까..ㅋㅋ
아직 못봤습니다만 총 9장까지 있고 작은 소제목이 많아 지루하지는 않을것같습니다.
아래는 예전에 까페에 올라온 저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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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필리핀으로 해외귀농을 선택한 이유
사람들은 나에게 열악한 필리핀으로 왜 가느냐고 오히려 판단을 잘못한 것이라고 말들이 많다.양돈을 한다 해도 3억 이상 자금마련은 되어야 한다면서 부정적인 말들을 한다.그러나 돈이 없으면서도 나의 의지는 확고하다.돈이 없는데도 긍정의 마음만 있다면 되어질 일은 되어짐을 알기 대문이다.원고를 썼을 때도 나는 돈이 없었다.그런데 책은 출판되었다.필리핀 가서 돈이 없었는데도 36세나 어린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지금도 나를 중신해준 아우가 바닷가에 3천평 부지를 구해놓고 집 두채를 짓고 있다.돈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이런 마음이 들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안된다.
나는 지금까지 운명적으로 살아왔다. 운명적으로 살면 한치의 후회도 없다.다만 정심(正心)을 바탕으로 한 불같은 의지가 바탕에 깔려져야 한다.그리하면 나에게 닥쳐온 운명에 대하여 맞서 싸워도 후회가 없다. 운명적으로 살아 온 몇가지 이야기를 하면 내가 필리핀으로 왜 가야 하는 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
1981년도 나는 농협에 경제과장으로 있었다.검찰수사로 농협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 지부장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지부장은 검찰에 다녀온 무용담을 이야기 하면서 아마 정과장 같았으면 오금이 저려 한마디도 못했을 거다라고 핀잔을 주었는데 그 말을 뒤집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어느날 문서 한장이 도착했는데 경기도 민정당 조직원들에게 25,000원짜리 양곡인환권 한장씩을 담보도 없이 지급하라는 내용이었다.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담당직원은 나에게 사표를 내고 다음날부터 나오지 않았다.나는 지부장에게 이의 부당함을 건의했다.민정당은 나라의 실세인데 무슨일이 있을라구 그냥 해 주어도 될거야 하면서 명령조로 이야기 했다.나의 눈에는 부당한데 왜 지부장은 하라고 종용하는 것일까.도지회 경제과장에게도 이의를 제기했다.마찬가지였다.중앙회에 가서도 항변을 했는데 **로 밤송이를 까라면 깠지 왜 말이 많으냐고 오히려 심한 말까지 들었다.어찌할 것인가.나의 고민은 점점 깊어만 갔다.나는 아내에게 사표를 내게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내가 할 수있는 일은 인환권을 발행하거나 사표를 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었다.사표를 낸다면 누군가는 또 나의 후임이 되어 이자리를 맡을 것이 아닌가. 중앙회보다 더 높은 기관은 어디일까.그렇지.청와대에 진정서를 내보자.상부의 독촉에 부딫쳐 조금씩 발급해 나가면서 나는 청와대에 진정서를 보냈다.청와대나 민정당은 똑같은 놈들인데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나는 농민을 위하여 일하는 농협직원으로서 농민의 돈이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데 민정당은 왜 부당하게 이 일을 추진하는 것이냐고 따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청와대에서 한통의 편지가 왔는데 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뜻박의 내용이었다.당신의 농협농촌사랑에 감동을 받았다.만약 인사상 불이익이 있다면 아래 전화로 연락하라는 내용이었다.나는 힘이 불끈 솟아오름을 느꼈다.그리고 그 날 난리가 벌어졌다.도지회로부터 지부장과 경제과장 호출명령이 떨어졌다.야-정과장 큰일 났어.심각한 일이 발생했나봐.지회장님이 잔뜩 화가 나셨어. 지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회장을 포함하여 10여명의 기라성같은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청와대에서 인환권 발급 중지명령이 떨어졌다고 도당위원장이 잔뜩 화가 나셨어.어찌된거야.정과장이 총책임자이니 설명 좀 해 봐.나는 기회는 이 때다싶어 큰소리로 외쳤다.농협직원으로서 담보 없이 인환권을 발급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나의 큰 소리는 분위기를 더욱 숙연하게 만들었다. 나가봐.지회장이 나지막하게 말했다.나는 가슴이 후련함을 느꼈다.사무실에 돌아와 있는데 민정당도당위원장 한테서 전화가 왔다.쥐새끼 같은 놈 미꾸라지 같은놈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렸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부장이 불렀다.나를 한수이북으로 보내라는 지회장의 명령이 떨어질 것이라고 자기로서도 어쩔 수없다는 것이었다.나는 교환양의 도청이 염려되어 밖의 공중전화에 가서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다.청와대 그 분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이제는 마지막이다 싶어 지부장 문을 노크했다.청와대에 민원을 낸 것과 방금 청와대 그 분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순간 지부장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다.그리고나서 한시간 쯤 지났을까.민정당 여성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나에게 사과를 하면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것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 뒤 인환권은 중단되었고 나는 시내 가까운 지점으로 발령되었다.사표를 낸 직원도 복직되었는데 일부 발행한 인환권은 결국 직원들이 변상했다고 한다.
(두번째 이야기)
농협 안성교육원에서 교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나는 주로 조합장반을 담임했는데 당시 조합장들은 우르과이라운드(UR)의 여파로 쌀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울분을 참지못해 삭발을 한 조합장들이 늘어났다.나는 겨우 차에다가 우리 쌀을 지킵시다.라는 스티카를 크게 써서 붙히고 다녔다. 그러는 중 중앙회에서 명예퇴직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한다는 문서를 하나 받게되었다. 나는 3개월이 모자라 할 수가 없었다. 신청직원이 없자 궁여지책으로 나이를 늘려 모집한다는 문서를 또 보냈다.이번에는 내가 해당이 되었다.우리쌀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입콩부터 막아야 한다는 나의 논리를 펴야 되겠다는 생각이 나의 명예퇴직을 부추겼다.이럴 즈음 중앙회 높은 분이 나에게 이번 인사에서 내가 모 시지부장으로 승진발령된다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승진이 되면 나는 명예퇴직 대상에서 누락이 되어야 한다.때문에 명예퇴직을 하려면 승진부터 막아야 한다.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를 무마시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며칠 동안이었지만 나는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하여야 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시지부장 발령을 취소하고 퇴직한다니까 미친놈이라고 까지 했다.그런데 딱 한분 내가 멘토처럼 존경하는 분은 당신답다고 하면서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내일이면 인사발령이 터지는 날. 중앙회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아무도 받지 않았다.전화기 앞에서 상당히 오랜시간 다이얼을 돌려서야 여직원과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오늘은 전화하지 마세요. 여직원이 끊으려고 했을 때 나는 재빠르게 승진발령을 취소해달라고 요청했다. 순간 여직원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아-그러세요. 그렇게 해서 나는 명예퇴직을 했고 우리콩살리기 운동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세번째 이야기)
우리콩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지인들이 나에게 한 질문은 모두 똑같았다. 퇴직한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느냐고. 그렇다고 대답하면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안됐다는 듯이 쳐다보곤 했다. 나는 우리콩 소비의 촉진을 제1목표로 삼고 물한번만 주면 3일만에 콩나물이 저절로 자라는 콩나물재배기를 개발하고 이어서 청국장 발효기 두부제조기 등을 개발하였다. 심지어 옛탈곡기 형태에다 모타를 단 콩탈곡기까지 개발하였다. 우리콩 생산 단계에서는 후계자 3명과 함께 20만평 콩재배를 했고 귀족서리태까지 개발하였다. 2006년도 겨울 어느 날이었다.소양댐 흙탕물이 심각한 것은 상류에서 농사짓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TV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나는 내내 눈물을 흘려야 했다.다음날 아침 나는 더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음을 느꼈다.콩 농사를 여기서 멈추자. 우리콩 살리기 운동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니 이제 멈추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수도권 시민들이 식수로 활용하는 소양강 댐의 흙탕물을 내가 앞장서서 개선시키자. 다음날부터 나는 영구히 개선시킬 수 있는 나무심기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알이 계란만큼 크다는 밤을 찾게 되었고 나는 1년에 만평 정도 심을 수 있는 계획서를 만들었다.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때 호사다마의의 훼방꾼이 찾아옴을 의식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사기꾼들에 걸려 나의 재산을 잃고 말았다. 그 역시 나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었는데 재산을 잃으면서 나는 더 큰 것을 얻게 되었다.
(네번째 이야기)
우리콩 살리기를 하다가 재산을 모두 잃었다 하더라도 나는 전화위복의 행운을 찾아냈다. 내가 책을 쓰리라고는 전혀 기대 밖이었는데 무려 3권의 책을 쓰게 된 것이다.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한 책.첫번째는 82세의 노인을 만나 변강쇠의 비법을 찾아내 "변강쇠 만들기"를 썼다. 두번째는 내가 가족력의 유전병에 걸려 죽음 직전에 살아 나면서 120세가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강수명 120 비결"을 썼다. 그리고 세번째는 "나는 23년 동안 한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부제-화를 내지 않는 비결)"이다.세번재는 한국이 아니라 필리핀에서 썼다. 두번째는 추운 겨울 전기장판 위에서 손목을 내놓고 쓰다가 수족냉증에 걸려 애를 먹었는데 세번째는 한국의 겨울을 피해서 쓰고 싶었다.책을 쓰기 위하여 필리핀을 찾은 것인데 거기서 나는 운명적으로 한 여인을 만나 시장 주례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필리핀으로 해외귀농을 선택한 이유이다. 필리핀에서 오래 살아 온 교민이 나에게 말해 주었다.필리핀의 농촌은 한국의 60년대와 비슷하기 대문에 누군가 이들의 소득을 높혀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세번째까지의 나의 이야기에서처럼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해야할 일이 나에게 떨어졌을 때 나의 전문성과 연결되어진 일이라면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이야기들이 나로 하여금 외면하지 않고 그 일의 중심에 서게 된것이 운명이며 그 운명을 받아드렸기에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감사의 충만함이 몸과 마음 속에 가득하다.이따금 허공에 대고 중얼거린다. 나는 왜 이리 행복하지? 지인들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그 때 사기꾼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부도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조언을 하곤 한다.그러면 나는 반박한다. 그 때 내가 망했기 때문에 나는 새생명을 얻었고 돈으로 살 수없는 3권의 책을 쓰게된 것이라고.
나는 필리핀 바왕에서 농업을 통하여 충분히 성공할 자신이 있다.사람들은 돈을 바탕으로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데 나는 다르다.나는 시골에서 고등학교 시절 산란계(레그혼) 300수로 학비를 벌며 다녔다.강원도에 가서 옥수수를 사다가 사료배합 기준표에 의거 자급사료를 만들기도 했다. 바왕은 해발 1미터 내외이다. 온갖 열대성 잡곡이 잘 된다.1 시간 거리에 있는 바기오는 해발 1600미터로 무우 배추가 잘 된다. 평균기온 18도이니 온갖 버섯 또한 잘 될 것이다. 30분 거리에 있는 중간은 해발 500미터로서 온갖 과일과 곡식이 잘된다. 자급사료를 만들어 자연양계와 자연 양돈을 한다면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곳.한국은 임차료가 평당 1500원 내외인데 그곳은 2~3백원이며 3모작이다.황사와 미세먼지가 없는 곳. 냉난방이 필요 없으며 년중 해수욕을 즐길 수있는 곳. 북서쪽이라 태풍도 거의 없다고 한다.나는 이곳에 30여년 전부터 구상해 온 상생 협동촌을 만들 계획이다.
댓글목록
이건기님의 댓글
제가 생각하는 정답은 100만원이 아닙니다. 70만원짜리 진주에 주인의 이윤이 30% 정도는 안될까요. 이윤 20만원 빼면 80만원 손해났네요.
운영자님의 댓글
빨간책에는 관심없고 그 복잡한 문제에만 머리 굴리셨군요~
저는 푸는거 포기했어요~ㅋㅋ
문용희님의 댓글
운영자님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