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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승전보 접한 마오쩌둥 “김일성은 일국 지도자…예의 갖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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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4-08-05 10:35:35
조회수
2,157

승전보 접한 마오쩌둥 “김일성은 일국 지도자…예의 갖춰라”

등록 : 2014.08.04 19:39수정 : 2014.08.04 23:54

1947년 1월, 전선에서 돌아오는 동북민주연군을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린장 군민들.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⑫ 국공내전 전세 바꾼 ‘108일 전투’

1945년 8월8일, 소련이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이틑날 오전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는 일본 관동군사령관과 참모장의 방문을 받았다. 사령관은 소련 적군의 소·만 국경 월경 사실을 통보하며 퉁화(通化)로 정부를 이전한다고 통보했다. 당시 배석했던 푸이의 친척에 의하면 이전 장소로 퉁화를 선택한 이유도 설명했다고 한다.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했을 경우 천황 폐하도 퉁화로 올 계획이다. 통화의 산속에 대규모 지하 공사를 완료한지 오래다.” 실제로 퉁화의 산간지역에는 도처에 인공 지하요새가 널려있었다.

만주국 수도 창춘(長春: 당시는 신경(新京)이라고 불렀다)을 떠난 푸이 일행은 퉁화까지 가지 못했다. 지린(吉林)을 경유해 8월13일 새벽, 압록강을 마주하는 린장(臨江)현 다리쯔(大栗子)에 도착했다. 다리쯔의 청산녹수(靑山綠水)는 한마디로 별천지였다. 울창한 삼림과 압록강, 강 건너 조선 땅이 보였다.

린장 일대는 대청 제국의 문을 연 누르하치가 300여년 전 호랑이 눈 피해가며 산삼을 캐던 곳이었다. 할아버지의 발상지에 초라한 몰골로 도달한 푸이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가늠할 방법이 없다. 8월15일, 히로히토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다음날 푸이도 퇴위조서를 발표했다. 평민으로 돌아온 푸이는 “청산은 변함이 없고, 푸른물은 항상 흐른다, 훗날을 기약하자”며 린장을 떠났다. 일년 몇 개월 뒤, 이 평화로운 폐광지역에 엉뚱한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분주히 오가며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예고하는 전주곡을 온 천하에 선보였다.

1946년 10월, 중국 국민당은 김일성의 제안에 의해 장백산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동북민주연군(중국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전신)과 일전을 준비했다. 같은해 12월17일부터 이듬해 4월3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두위밍(杜聿明), 쑨리런(孫立人), 랴오야오샹(廖耀湘) 등이 지휘하는 국민당군(국민혁명군) 주력 8개사단이 4차례에 걸쳐 린장 지역의 동북민주연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린뱌오(林彪)가 총 지휘하고 류야러우(劉亞樓), 샤오징광(蕭勁光), 훙쉐즈(洪學智), 리줘평(李作鵬) 등이 지휘한 동북민주연군은 국민당군의 끈질긴 공격을 저지하며 국민당군을 괴멸시켰다

.

중공 전사(戰史)에 ‘4보임강(四保臨江)’으로 기록된 108일간의 전투는 국공내전의 이정표였다. ‘4보임강’에서 승리한 동북민주연군은 여유를 찾았다.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한 동북연군은 1948년 다시 공세로 전환,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승전보를 접한 마오쩌둥은 지휘관들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투에서 우리를 도와준)김일성은 지난날 우리의 동지였지만, 이제는 일국의 지도자다. 앞으로는 예의를 갖춰라.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전처럼 허물 없이 대하지마라."

1983년 베이징을 방문한 김일성을 맞이하는 천윈(왼쪽). 1946년 겨울 린장 보위전을 계기로 첫 인연을 맺었다.

압록강변 마주한 린장 일대에서
국민당군과 벌인 ‘린장 보위전’
평북 초산은 동북군 최대 후방기지
300가구 마을에 13개 기관 이전
중공 부상병 1만5천명 북한서 치료

국민당군 괴멸뒤 주리즈 보고서
“조선의 공로를 잊어선 안 된다
형제국 곤란 겪으면 보살펴야”
공식 외교관계 때 유의사항 언급

전쟁은 묘하다. 제 아무리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정신력으로 무장됐다하더라도 후방이 든든하지 않으면 승리할수 없다.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고, 보급이 원만하지 못하면 사기와 정신력은 순긱간에 허물어진다. 린장 일대에서 국민당군과 일전을 앞둔 동북민주연군 사령관 린뱌오는 중공 동북국 서기와 정치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동북국 부서기 겸 부정치위원인 천윈을 북한으로 파견했다. 이어서 랴오둥(遼東) 군구사령관 샤오징광 앞으로 전문을 발송했다. “후근(후방) 업무가 중요하다. 안전한 지역에 후근부를 설치해라.” 안전한 지역은 강 건너 조선땅 외에는 없었다.

랴오둥 군구는 평안북도 강계에 후근부를 설치했다. 압록강변인 평북의 수풍, 초산, 만포, 중강 일대에 탄약고를 설치하고 필요할 때마다 강 건너 다리쯔, 창바이(長白), 안투(安圖)로 운송했다. 군량미 저장소와 의약품, 피복창고도 중강진과 초산 일대로 분산시켰다. 신의주, 만포 할 것 없이 북한 땅 곳곳에 랴오둥 군구의 창고가 들어섰다.

린장 보위전이 시작되자 군구 후근부는 북한에 저장했던 전략 물자들을 다시 동북으로 수송했다. 압록강 연변은 김일성의 지시로 동원된 군, 관, 민들로 복작거렸다.

전쟁기간 동안 평북 초산은 동북 민주연군이 북한 땅에 설치한 최대의 후방기지였다. 300여가구가 살던 작은 지역에 랴오둥 군구 공병부와 야전병원을 포함해 13개 기관이 이전해 있었다. 심지어 퉁화현은 현 정부가 통째로 와 있었다고 한다.

전쟁은 사람 죽이는 놀음이다. 의료시설이 중요하다. 장정과 항일전쟁을 경험한 중공은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수없이 보아왔다. 의료진과 의약품의 확보가 전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부분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본 패망 직후 하얼빈 등 대도시를 점령한 동북 민주연군은 일본이 운영하던 병원의 의사와 의약품들을 징발했다. 랴오둥 군구 위생부는 이들을 압록강 인근으로 집결시켜 북한 경내 진입을 준비했다. 다리쯔에 임시 총부를 신설하고 의사라면 돌팔이건 가축병원 의사건 깡그리 긁어 모았다. 사람을 치료해 본 적이 없다며 나서기를 거부하는 동물병원 의사들에겐 사람도 동물이라며 윽박질렀다. 북한 땅에 중국인 의사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김일성은 이들을 각 군에 골고루 배치했다. 만포와 강계 쪽에 특히 많았다. 일부는 항일 빨치산 시절의 추억이 어린 옌지(延吉) 지구의 왕칭(汪淸)현에서 대기시켜 전쟁 상황에 대비했다.

의료시설과 부상병들의 압록강 도하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랴오둥 군구 의료공작대원의 회고를 간추려 인용한다. “산간지역에서 부상병들과 일개월 이상을 보낸 적도 있었다. 순전히 조선 쪽에서 보내오는 의료품 덕분이었다. 사방이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는 다들 죽는줄 알았다. 멀리 눈아래 압록강 바라보며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간신히 숨만 쉴뿐 죽은 목숨이나 매 한가지였다. 하루는 사단에서 파견된 사람이 상부의 지시를 전달했다. 재주껏 산에서 내려와 강변에 집결해라. 압록강만 건너면 무사하다는 내용이었다. 희망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당시 조선은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통신기구도 없는 상황에서 산간에 흩어져있는 부상병들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지만 기우였다. 희망이 담긴 소문은 그 어떤 통신기구보다 성능이 우수했다. 사방이 빙설천지였다. 적에게 발각될까봐 큰길은 나갈 엄두도 못냈다. 작은 산길은 얼음투성이였다. 미끄러지고 구르기 일쑤였다. 우리는 부상병들을 소 달구지로 실어 날랐다. 소들이 맥없이 주저않았다. 가까스로 얼음 언덕에 오르면 부상병들을 밑으로 밀었다. 얼음을 타고 내려온 부상병들을 밑에서 받았다. 압록강변에 도달했을 때 낙오자가 한명도 없었다.”

1947년 봄, 린장 보위전이 완료되자 북한 경내에 산재했던 군구의 의약 창고와 의료진들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다리쯔로 철수했다.

린장 보위전은 소수가 다수를 제압한 전쟁이었다. 중공의 주력인 팔로군이나 신사군은 보위전 이전까지만 해도 치고 빠지는 유격전 위주였다. 대형 전투를 치른 적은 거의 없었다. 린뱌오의 명성을 재확인시켜주는 전쟁이기도 했다. 항일전쟁 시절 상승장군이라 불리던 린뱌오도 국공전쟁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대도시를 국민당군에게 내주는 바람에 한동안 ‘철수장군’이라는 오명이 따라 다녔지만 린장보위전을 계기로 “우리는 린뱌오의 전사들”이라는 군가가 저절로 유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동북민주연군도 중공의 주력중의 주력, 정예중의 정예로 탈바꿈했다. 린뱌오 39세, 김일성 35세 때였다.

1947년 6월 27일, 중공 동북국 평양주재 연락사무소 전권대표 주리즈는 린장 보위전 기간동안 1만5000명의 부상병이 북한 땅에서 치료받았다는 보고서를 동북국에 올렸다. 1948년 8월11일, 동북 전역에 승리가 임박했을 때도 그는 보고서에서 “조선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며 장차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성립되더라도 염두에 둬야할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조선과의 관계는 외교관계가 되야한다. 단, 형제 나라와의 외교관계는 제국주의 국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양국 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상담이나 회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충분한 비판과 자아비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단결을 모색해야한다.

쌍방의 의견 충돌에 당황해선 안된다. 성급히 풀려고 하지말고 소련에게 주선을 부탁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견지할 것은 견지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한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조약을 통하거나 협의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되 준수해야 한다. 일처리를 할 때 공개와 비밀을 병행해야 한다. 북조선이 국제적으로 곤란에 처했을 때 우리가 보살펴야 한다.”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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