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신당 - 아니 열린우리당의 한계는 창당 그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로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민주화니 개혁이니 말이야 잘 한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 민주화이고 개혁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었다. 뭉뚱그려 계급의 시대는 갔다며 국민정당 운운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결국 그 어떠한 계급도 위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
아마 2002년 대선이 끝나고 100분토론에 출연했을 때였을 것이다. 당시 개혁신당의 대표 자격으로 노무현측 패널로 나온 유시민은 앞으로 한국정치가 나아갈 바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아주 같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맥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남 노동자나 호남 노동자나 결국 같은 이해를 갖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선택해 지지해야 하는데, 자신들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지역에 따라 정당을 선택하고 지지하는 현재의 정치구도는 왜곡되어 있다. 영남의 노동자든 호남의 노동자든 자신들의 이해를 배변하는 정당을 지지하고, 자영업자 역시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정당을 선택해 지지할 수 있어야 지역주의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유시민이 개혁신당까지 깨 가며 열린우리당을 창당해서는 결국 한 일이라고는 영남 지역주의에 의지해 지역주의를 깨드려보겠다고 하는 한심한 짓거리였다. 심지어 2004년 총선 당시 부산에서 그리 처참하게 깨지고도, 부산에서 지지를 더 얻어보겠다고 제주도로 결정되어 있던 APEC 개최지를 부산으로 옮겨 버렸으니.
지역주의를 깨드려보겠다고 영남 지역주의에 아첨한 결과가 도리어 영남 지역주의의 강화였다. 거기다 노무현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호남의 지역주의 역시 강화되면서 오히려 지역주의는 현정부 들어와서 더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계급에 따른 투표가 필요하다면서도 영남의 노동자와 호남의 노동자, 영남의 상공인과 호남의 상공인, 영남의 지주와 호남의 지주를 한 데 묶을 생각을 못하고, 오로지 지역주의에 기생하여 양쪽에서 더 높은 지지를 얻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 양 여긴 때문이다.
결국 철학의 부재였다. 정당으로서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제대로 생각지 못하는 한계였다. 그래서 당장 하는 일이라는 게 눈앞에 보이는 권력에 빌붙는 것이고, 설사 그것이 부당하여 깨뜨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빌붙어 아첨하여 무언가 얻어보려는 천박하고도 조급한 모습이나 보일 뿐이다.
반면 관록은 관록이라는 것인지 한나라당은 처음부터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탄핵역풍으로 어렵던 때조차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의심받을만한 작은 언행조차 용납지 않았다. 오로지 일관되게 대기업과 사학재단, 특정 종교, 그리고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한 정당임을 분명히 했고, 그들의 믿음을 결코 배반하지 않았다. 어차피 호남이야 버리는 지역이었으니 열린우리당처럼 호남지역주의에 아첨할 이유가 없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러한 그들의 행보는 그들의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이러한 한나라당의 행보는 그들에게 더없이 큰 선물을 안겨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도권 - 특히 서울의 지역주의였다. 부동산을 보유하여 더 많은 개발이익과 더 적은 세금을 원하는 서울의 집가진 사람들이 초지일관 가진자들을 위해 노력하는 한나라당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이 얻는 막대한 부동산 차익을 눈으로 본 서민들도 덩달아 이들을 따라 한나라당을 지지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러한 지지가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는 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통합신당 - 구 열린우리당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그들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호남지역주의에는 스스로 등을 돌려 버렸고, 영남 지역주의는 처음부터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어떠한 계층, 계급도 그들에게서 이익을 보지 못했으니. 아무도 그들로부터 어떠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얻지 못한 것이다.
물론 말이야 중산층이니 서민이니 잘도 떠들어댔다. 중산층과 서민이 어떻게 같이 묶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고 입으로는 잘도 떠들고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중산층과 서민이 체감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보여주지 못한 채. 그런 주제에 아직도 매달리고 있는 것은 민주니 평화니 개혁이니 부패니 하는 공허한 구호들.
원래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선거는 결코 그런 모호한 구호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다. 그게 자본주의다. 설사 그것이 허상일지라도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여길 때 사람들은 표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표한다. 아파트값이 오르기를 기대해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처럼, 당장 경기가 좋아져 수입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이명박에게 표를 주었던 것처럼 그러한 현실적 이익을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런데 과연 통합신당이 보여줄 수 있는 이익은?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의 정당이라면 그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누구를 위할 것인가? 어떠한 계급의 이익을 최우선해서 추구할 것인가? 아마 지금 통합신당의 정체성이라면 도시 화이트칼라, 전문직종 종사자, 혹은 지식산업등의 가치산업에 속한 사람들을 위한 자유주의 정당일 것이다. 결코 서민을 위한 정당은 아니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나,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보더라도 서민 - 특히 노동자를 위한 정당은 결코 될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도 특히 서민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통합신당이 아닌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처럼 서민을 위한 정당이 될 수 없는 정당이 섣불리 서민을 내세우느라 도리어 배신감과 분노를 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서민을 내세우지 않았으면 모르겠으되 서민을 위한다면서도 전혀 하는 것이 없으니 차라리 한나라당을 찍자 할 밖에.
따라서 서민을 위한 정당이 될 수 없을 것이라면 차라리 서민을 버리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다. 서민이야 진정 서민을 위하겠다는 계급정당 민주노동당이 기왕에 있으니 그리 맡겨 버리고, 자신들이 진정으로 위할 수 있는 집단을 찾아 그들을 위함으로써 그를 중심으로 그들을 끌어들이라.
어차피 서민 가운데 영원히 서민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월세방 살면서도 종부세 걱정하는 것이고, 송곳 꽂을 땅도 없으면서도 양도세 걱정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장차 서민을 벗어날 수 있는, 장차 서민에서 벗어나고서 누릴 수 있는 꿈을 보여주라. 비전을 보여주라. 그것이 어떻게 이익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라. 그것이 이익이 된다고 여겨지면 당장 발벗고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표를 던질 것이니. 당장 돈이 된다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라도 지지자가 되어 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자본에는 선도 악도 윤리도 정의도 없다. 이익이 눈앞에 있을 때 닥치고 달려들어 물어뜯는 게 자본주의다. 그러한 이익과 이익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법이며 윤리이며 도덕이다. 이익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의고 뭐고 없다. 이익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리 옳지 못하다 썩었다 떠들어봐야 공염불에 불과하다. 그것이 현실이며 미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어떠한 이익을 누구에게 줄까를?
하지만 이렇게 문제를 인식했다 하더라도 통합신당에게는 한 가지 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과연 지금에 와서 그러한 일을 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당장 이번 선거에서 자신들을 지지해 준 호남의 지역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데, 호남의 지역주의를 버리고 나면 그야말로 뿌리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기 쉽다. 열린우리당도 결국은 그렇게 도로호남당으로 회귀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렇게 되었다가는 계급정당으로도 거듭나지 못하고. 지역정당으로도 되돌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지리멸렬 흩어질 가능성이 높은데 누가 그런 모험을 하려 들까? 차라리 호남지역당으로 주저앉으면 최소한 호남에서나마 안정적으로 의석을 확보해서 야당으로서 어느 정도 지분은 확보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호남 지역정당으로 주저앉아 전국정당이 되어 버린 한나라당 옆에서 콩고물이나 주워먹더라도 통합신당 기회주의자들이 보기에는 그쪽이 훨씬 나을 수 있다.
사실 답은 나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한 대로 가장 안전빵인 호남지역당으로 주저앉고 말 것이다. 스스로 자신들이 대변할 수 있는 계급을 찾아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함으로써 장차 전국적인 정당으로 거듭나기보다는 당장의 어려움을 피해 가장 편한 지역당으로의 회귀를 꿈꿀 것이다. 당장 유시민을 대구 수성에 출마시키겠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 뻔한 속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이 그러했듯 호남 지역주의에 안주해 영남 지역주의에 아첨하며 지역주의를 깨보겠다 말로만 떠드는 호남지역당이 되어 버리겠지.
결과를 알면서도 지켜보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다. 그 끝이 전혀 재미없는 결말이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유일하게 한나라당과 견줄 수 있는 거대정치집단이라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솔직히 보고 있기가 너무 짜증난다. 이런 인간들이 개혁이니 민주니 평화니 떠들어댄다는 자체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가장 큰 불행이랄밖에.
그나저나 가만히 돌아보니 하여튼 그런 주제에 민주, 부패, 정의, 도덕... 잘도 떠들어대는구나. 결국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든 것이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 자신일 텐데. 신자유주의라는 게 이런 것인 줄 몰랐던 것일까? 대통령이 당당하게 일갈한 "경쟁해서 이기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의 끝이 이런 것이라는 걸 정말 몰랐던 것일까?
하긴 몰랐기에 계급은 없고 "국민" 뿐이라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계급의 시대는 갔다며 모든 국민을 위한 정당이라 너무도 당당히 선언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주제들이기 때문이었을 테지만. 그저 총선 이후가 암담할 뿐이다. 아직 이렇게 판세를 읽지 못해서야. 지금 세상이 어떤지, 사람이 어떤지 여전히 알지 못하지? |
댓글목록
이덕수님의 댓글
운영자님의 댓글
말로만 떠드는 개혁
말로만 깨자는 지역주의.....
살아있다는 것은 답답하다는 것인가봐요
이덕수님의 댓글
정치가는 이런 국민들의 속 사정을 읽어 파란 희망의 꿈을 실현시켜 주고나서
사랑 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랑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