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알약, 시럽 반 스푼에 삶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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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9-01 07: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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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50여년 전의 사건인데 한국의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과 어찌 이리 흡사할까요?
관료의 무지와 직무유기, 기업우선주의등의 공통점이 있군요.
경향신문 기사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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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독일 ‘탈리도마이드’ 비극
‘단 하나의 알약’이었다. 비앙카 포겔(55)의 인생을 뒤바꾼 것은 탈리도마이드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 콘테르간 알약 한 개였다. 1960년 임신 3개월차인 포겔의 어머니가 이 약을 먹은 뒤 포겔은 남들보다 짧은 팔로 태어났다. 손이 어깨에 달린 아기를 보고 사람들은 “당장 버리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포겔이 기형아로 태어난 이유가 약에 들어있는 화학물질 때문인지 몰랐고 약을 판매한 그뤼넨탈 회사도, 독일 정부도 사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안다. 포겔은 “나는 화학물질의 부산물”이라고 했다.
지난 24일 오전(현지시간)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의 작은 도시 진치히에서 만난 탈리도마이드 피해자 포겔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계속 울먹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팔이 없기에 컵과 그릇을 입술로 물어서 옮기고, 발로 자동차 운전을 하는 그는 이젠 그런 방식이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까지의 과정은 자신에게 ‘트라우마’라고 했다. “생긴 대로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포겔의 어머니는 입덧이 심해 콘테르간 약을 먹었다. 당시 광고에선 “1000알을 먹어도 죽지 않는 수면제의 혁명”이라고 했다. 인체에 아무런 해가 없다고 했기 때문에 임신부가 입덧을 한다고 하면 의사들도 정확한 처방 없이 이 약을 권했다. 아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음료 형태로도 팔렸다. 약의 복용법이 어떻게 되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꿀 바른 사탕처럼 팔렸다”고 포겔은 당시를 설명했다.
역시 탈리도마이드 피해자인 비어깃 슬뢰서(55)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슬뢰서의 어머니가 심한 입덧으로 힘들어하자 그의 아버지는 보다못해 당시 다섯 살인 슬뢰서의 언니가 먹던 음료형 콘테르간 약을 어머니에게 줬다. 어머니는 처음엔 “안 먹겠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설득으로 약을 먹었다. ‘반 스푼’이었다. 슬뢰서의 아버지는 딸이 기형아로 태어난 게 자신이 권한 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 뒤 벽에 머리를 박았다.
1961년 11월27일 독일 신문사 디 벨트가 처음 약에 문제가 있다고 보도하면서 사건이 알려졌다. 며칠 뒤 독일 정부는 약 판매를 금지했다. “1년만 더 일찍 판매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면 우리는 이렇게 태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포겔은 한숨을 쉬었다. 1957년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콘테르간은 판매 직후 부작용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됐지만 독일 정부는 빠르게 조치하지 못했다. 슬뢰서는 “처음엔 피해자 수가 적었기 때문에 정부가 의혹을 무시하고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조금이라도 더 빨리 금지 처분을 했으면 피해자 수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늦어져 최종적으로 금지 처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포겔은 “거대한 화학산업계의 로비력이 강하고, 정부는 기업을 도와줬기 때문에 약에 대한 정보가 수면 아래로 숨고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화학물질 관리 제도의 문제도 있었다. 당시 소련의 위성국이던 동독에서는 콘테르간 판매가 허가되지 않았다. 허술한 심사 과정을 거쳐 허가를 받은 서독에서만 1만명에 가까운 피해자가 나왔다. 미국에서는 프랜시스 올덤 켈시라는 공무원이 이 약 허가를 검토하면서 ‘사람에게는 수면제 효과를 내고 동물실험에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허가 제출 자료를 이상하게 여기고 허가를 내주지 않아 피해자가 17명에 그쳤다. 켈시는 미국을 구한 영웅으로 떠올라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럼에도 독일 정부와 그뤼넨탈 회사는 아직까지 콘테르간과 기형아 출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검찰이 그뤼넨탈사를 수사해서 기소하고, 피해자 부모들이 그뤼넨탈을 상대로 소송했지만 유명 변호사들을 선임해 대응한 그뤼넨탈에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태아에 미치는 영향을 제약회사가 반드시 검증토록 하지 못한 법의 맹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죄 판결이 났지만 그뤼넨탈사와 정부는 100만마르크씩 총 200만마르크를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기금으로 냈다. 20년치 연금을 지급하고 이후는 정부가 부담하기로 했다. 소송에서 진 피해자 부모들은 이 방안에 합의했고, 이후 더 이상 그뤼넨탈에 법적인 책임을 묻기 어려웠다. 인터넷이 없어 정보도 제대로 알 수 없고 기형아 출산의 책임을 부모에게 떠넘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결론이었다. 2012년 그뤼넨탈사가 피해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사과한 것이 전부다. 포겔과 슬뢰서는 “아직도 정부와 그뤼넨탈이 사고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슬뢰서가 말했다. “저한테는 매일 생활하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안고 사는 거예요. 시장에만 가도 사람들과 부딪치는 게 무섭고, 제가 계산대 앞에 서면 사람들은 불쌍한 눈빛으로 제 물건을 대신 계산대에 올려주죠. 높은 데 있는 건 남편이 다 집어줘야 하고요. 문제는 절대 끝난 게 아니죠.”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던 슬뢰서는 어깨가 아파 일을 그만뒀다. 포겔도 몸이 좋지 않아 유치원 교사 일을 그만둘 계획이다. 포겔은 “내가 좋아하는 승마도 계속하고 싶지만 몸이 아파서 할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울고 있다”고 말했다.
2013년 8월에야 이들이 받는 연금 액수도 실질적으로 생활에 도움되는 수준으로 올랐다. 그 전까지는 팔다리가 모두 없고, 장기도 손상돼 거의 자발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장애 정도 심각’ 단계 피해자가 한 달에 545유로(약 68만원) 정도를 받았고, 2013년 이후 7000유로(약 873만원)로 높아졌다. 치료비 등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포겔은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콘테르간 때문에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연을 적어서 정부에 제출하고 정치인들에게도 요구했다”며 “이후 정부가 탈리도마이드 피해자들의 삶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정부와 의회는 한 달 545유로로는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콘테르간 피해자 지원법을 개정해 연금 액수를 높였다고 했다. 현재 이 연금을 받고 있는 피해자는 2400명 정도다.
독일에선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일컬어 ‘한국판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고 한다. 포겔은 한국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기업은 제품을 팔려고만 하고, 정부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탈리도마이드 사건과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비슷한 점이 많아요. 그래도 탈리도마이드 사건 이후 독일이 바뀐 점은 있습니다. 약의 허가를 매우 복잡하게 하도록 하고, 처방전이 있어야만 약을 줄 수 있고, 복용법을 약품에 기재해주도록 제도적 개선을 했죠. 지속적으로 항의해서 연금 액수도 올렸고요. 절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갈 길이 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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